넓디넓은 사막 아래 천천히 달빛이 희미해져갔다.차가운 새벽 안개속에
황금빛 모래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이 황량한 사막에는 얼핏 보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아주 차가워 보이는 큰 오아시스 근처에는 커다란 은빛 물탱크가 있었다.그 물탱크는 작은 텐트마을로 이어져있다.이 마을은 루티니 부족의 정착지이다.사막에서 살아가는 거의 유일한 부족인 루티니 부족.
부족의 은빛과 갈색이 섞인 가죽 텐트중 가장 적갈색을 띄는 텐트에는 두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루티니 부족의 부족장 동리우의 딸인 타야, 그리고 그녀의 친구 리샤.
둘은 어릴적부터 단짝이었다.
그들이 잠든 두터운 가죽 담요 위 지붕에 차가운 이슬이 맻이더니
타야의 콧잔등으로 똑,똑 떨어졌다.타야는 얼굴을 찡그리고 몇 번 뒤척이더니,마침내 일어나 앉았다.하나로 꽉 묶인 황갈색 곱슬머리가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타야가 불편해하며 머리를 흔들었다.어째서인지 그 머리끈은 절대로 풀리지 않았다.
매서운 새벽바람에 타야는 일어나 망토를 찾았다.텐트 구석에서 요오크 가죽으로 된 망토와 쇠철 단도,단도집을 찾은 타야는 망토를 두르고 허리띠를 조인 다음,단도를 허리춤에 찼다.요오크는 이 사막에 사는 물소처럼 크고 뿔 달린 갈색과
은색을 띄는 동물로,부족의 주 식량이자 재료였다.그들은 요오크 가죽으로 옷을 짓고 텐트를 지었으며,힘줄은 실로 썼다.또 뿔은 깎아서 조각을 하거나 빗,바늘 같은 것을 만들고,고기는 육포로 만들어 먹었다.지방은 가장 쓰임새가 많았는데,불을 필 때 쓰기도 하고 국에 넣고 끓이기도 하며,가죽 담요
사이에 넣어 꿰메 이불로도 썼다.
타야는 리샤의 잠든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리샤를 흔들어 깨웠다.
"리샤,리샤!일어나."
리샤가 잠결에 뒤척였다.그녀는 담요를 꽉 잡고 뭐라고 몇 번 잠꼬대를 중얼거렸다.그러고는 다시 잠들어버렸다.리샤는 그렇게 타야가 세번이나 더 부르고,네 번째로 부르고도 안 일어난다면 이불을 치우겠다고 소리치자 겨우 일어나 앉았다.그리고 요오크의 하얀 뿔로 만든 빗을 찾아 자신의 검은 생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곧 엄마가 올 시간이라고."
타야가 구박하는듯 장난스레 말했다.
"으아,나 이렇게 못 일어나서 전사는 어떻게 되냐.."
리샤가 머리를 빗다 말고 빗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사가 일어나는거랑 무슨 상관이야."
"14살이나 됬는데 제시간에 못일어나니까 그렇지."
리샤는 투덜거리더니 자기 망토와 쇠철 단도,단도집을 챙겼다.
그들은 15살이 되면 전사가 될 수 있었다.부족원은 전통적으로 15살이 되기 전에 손목이나 얼굴에
넝쿨 모양의 남색 문양이 생긴다.그리고 15살이 되면 부족장으로부터 이 사막에서만 나는 광물인 '섭'으로 만든 단도인 '청금'을 받고,부족의 전사가 된다.섭은 철보다 5배이상 단단하고 가벼우며,반투명한 푸른빛의 날카로운 광물인데,부족의 거의 모든 무기는 섭으로 만들었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며 살짝 벌어진 텐트 입구로 텐트 내부를 비췄다.텐트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말린 선인장 열매와 요오크 가죽부터 부서진 요오크 뼈 조각품,선인장 가시를 엮어 만든 바구니그릇,가죽 방석까지 참 다양하기도 했다.
"아침 먹어요-아침-!"
타야가 잡동사니를 바라보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엄마 티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침이면 늘 선인장 가시 바구니를 들고 사람들을 깨우며 아침거리를 주는 티니스는 워낙 목소리가 커서 가끔 원로분들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한다.
원로들의 텐트는 마을 가운데에 있다.그 텐트 맞음편에는 어린아이들 텐트가 몇 채 있고,식당용 텐트 두세 채,부족원 텐트 열몇 채가 둥글게 둘러쌓여 있었다.
그리고, 부족장의 텐트도.
다들 텐트에 모여 좁게 생활하는데 타야가 이렇게 편하게 개인 텐트를 쓰는 건 다 부족장의 딸이기 때문이었다.물론 타야는 단짝 리샤와 텐트를 함께 쓰지만 말이다.
부족원은 모두 4-50명 정도 된다.
티니스가 타야의 텐트로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텐트 입구를 들추어 열었다.그리고 그들이 깨어난걸 발견하고
바오밥나무잎 차가 담긴 찻잔 두 개와 커다란 요오크 육포 두 쪽을 나눠 주었다.
"아버지는 내가 15살이 되도 나에게 청금을 주시지 않을 것 같아."
티니스가 떠난 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육포를 자르던 타야가 말했다.
"왜?"
리샤가 물었다.바오밥나무잎 차를 싫어하는 리샤는 그냥 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내가 청금을 갖기에는 15살도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셔.."
타야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다른 전사들에게는 주셨잖아?"
리샤는 여섯 조각으로 나뉜 육포 중 한조각을 입에 넣었다.
타야는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바오밥나무 차를 한 모금 마셨다.기분 탓인지 차가 좀 차가웠다.
"기운 내,타야.오늘은 전갈이라도 잡아보자고."
리샤가 아까 떨어뜨렸던 빗을 다시 집어들며 말했다.
"뭐,그래..하지만 난 요오크를 잡고 싶어."
타야가 단호하게 말했다.순간,떠오르는 태양의 빛 때문인지 타야의 손목에 새겨진 구불거리는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
"청금도 없이,그것도 여자가 혼자 잡는다는게 말이 안 되잖아."
리샤가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타야는 리샤 몫의 찻잔을 집어들었다. '혼자'라는 리샤의 말에 섭섭함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나도 알아.요오크는 청금을 가진 전사가 3명이나 따라붙어야 할 정도로 성질이 사나우니까.하지만 그 일을 해내지 않으면 난 영원히 청금을 받지 못할거야..."
타야의 말끝이 살짝 떨렸다. 그녀도 요오크를 잡는 게 목숨이 걸린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제 태양은 높이 떠올라 불타오르고 있었다.
"타야,나갈 시간이야."
열린 텐트 입구로 전사 루안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올해로 24살인 루안은 동생 리안과 함께 요오크 사냥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증명이라도 하듯 막 떠오른 뜨거운 태양이 루안의 허리춤에 꽃힌 청금 단도를 비췄다.빛을 받은 청금이 아름답고 투명하게 빛났다.
"갈게요,루안."
타야가 답했다.그리고 남은 차를 단숨에 마신 뒤 남은 육포 한 조각을 이제는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리샤에게 건넸다.타야는 자신의 은빛 모피 스카프를 목과 코까지 꽁꽁 두르고 은제 물병 두 개를 들었다.그리고 공용 급수대로 향했다.
공용 급수대는 마을 가운데쪽에 있어서 마을 바깥쪽에 위치한 그녀의 텐트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마침내 급수대에 도착하자 타야는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유달리 예민한 그녀의 귀에 멀리 물탱크에서 물을 빨아들이는 듯한 찰찰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물통에 물이 꽉 차자 타야는 뚜껑을 힘껏 꽉 닫고,허리띠에 하나를 꽂았다.그리고 떨어지지 않도록
물통 가죽끈으로 허리에 물병을 꽉 졸라맸다.
태양은 벌써 하늘 높이 솓아오르고 있었다.9시쯤 된것같았다.타야가 돌아가자 리샤는 타야에게 가죽끈 하나를 건네주었다.만일을 위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5살이 되면 받을 수 있는 가죽끈인 '룸'이었다.
타야는 룸을 받아 허리춤에 쑤셔 넣고,벨트로 고정했다.그리고 리샤에게 물통을 넘겨주었다.
리샤도 망토 안쪽에서 긴 가죽끈을 꺼내어 물통을 허리에 맸다.
그들이 마을 입구로 걸어나가자 그들을 기다리던 동리우가 외쳤다.
"타야,서두르거라!지금 시간이 많이 지체됬어!"
동리우는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나와 루안,리안은 사냥을 가야하니,너희는 전갈을 잡거나 선인장을 뽑아 식량을 모으거라."
동리우는 이 말을 끝으로 루안,리안과 함께 휭하니 가버렸다.
타야는 무의식적으로 일곱살때 받은 철 단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철 단도는 태양 빛을 받으며 그녀의 허리춤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문득,타야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청금이...꼭 있어야할까?'
하지만 곧 머리를 흔들었다.흘러내린 황금빛 머리칼이 시야를 흐트러뜨렸다.
'내가 도데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정신차려야지!'
리샤가 걱정스러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타야,너 괜찮아?우리 어서 나가야해."
"그래..."
타야는 고개를 들어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높은 벽을 이제서야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순간,그녀의 손목에 새겨져 있는 넝쿨 문양이 빛나더니 살짝 더 길어졌다.하지만 눈부신 햇살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심지어 타야 자신까지도.
태양빛이 가장 뜨거운 시간이 되었다.뙤약볕 아래에서 그들은 전갈 한 마리를 쫓고 있었다.리샤가 도망치는 전갈을 향해 자신의 단도를 날렸다.단도는 전갈의 단단한 갑옷에 부딛혀 날카로운 스크레치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타격이 됬는지 전갈이 하늘을 찌를 듯 맹렬하게 독침을 세웠다.
"윽!칼을 집을 수가 없어!"
리샤가 전갈 옆에 떨어진 단도를 집으려다 날아오는 독침을 피하며 외쳤다.리샤의 손등에 긁힌 자국이 생겼다.살짝 긁혔을 뿐인데도 상처가 보랏빛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내가 유인할 테니까,가죽으로 상처를 압박하고 단도를 챙겨!"
타야는 자신의 단도로 전갈을 찌르기 위해 애썼다.마침내 전갈이 자신을 쫓아오자,그녀는 힘껏 단도를 던졌다.단도는 푹 소리를 내며 전갈의 등껍질에 박혔다.
"휴,잡았다."
그녀는 품 속에서 가죽 자루를 꺼내고 장갑을 낀 다음,전갈의 독침을 뽑았다.그리고 꺼내놓은 가죽 자루에 전갈을 집어넣었다.
전갈은 식량으로 쓰고,껍질은 무기로 쓰일 것이었다.타야는 전갈의 독침도 자루 속에 넣었다.무기에 꽂아 쓸 수 있을 터였다.
"...타야!뒤를 봐!"
갑자기 리샤가 외쳤다.리샤는 뒷걸음질치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 공포가 비쳤다.
"..헉!!"
타야의 연갈색 눈동자가 커졌다.그녀의 뒤에서는 다 자란
요오크가 뿔을 세우고 푸르르거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도망칠 것인가, 맞설 것인가. 게다가 이곳은 요오크가 잘 출몰하는 지역도 아니었다. 그러나 타야는 순간 마음을 굳히고 철 단도를 뽑았다.
'나는 지금 벽을 부숴야 해!'
그녀는 생각했다.순간 타야의 문양이 푸르게 빛나더니 그녀의 머리를 꽉 조이고 있던 머리끈이 살짝 느슨해졌다.
"타야!너 뭐 하는거야!"
리샤가 소리쳤다.그녀 역시 단도를 들고 있었지만 요오크와 싸울 생각은 없어보였다.타야와 요오크가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드는 찰나,날카로운 모래바람이 몰아쳤다.
모래바람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자 타야는 청각을 이용했다.요오크는 모래바람을
신경쓰지 않는듯했다.
"난 요오크를 잡아야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타야가 외쳤다.희미하게 요오크의 흰 뿔이 보였다.녀석은 그녀의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윽!"
요오크의 뿔을 있는힘껏 막아내며 타야가 신음했다. 요오크의 뿔이 들이받은 충격이 단도를 통해 그녀의 손목까지 내려와 전류가 흘렀다. 거대한 적갈색 다리 사이로 미끄러진 그녀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그 짧은 순간 모래가 날카롭게 손등을 쓸고간 흔적이었다.상처입은 손의 반댓손으로 떨어뜨린 단도를
집어든 타야는 재빨리 요오크의 다리 밖으로 기어나왔다.모래바람이 희미해지면서 거대한 요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요오크의 턱을 찌르려고 했지만 요오크는 고개를 숙이고 뿔을 들이댔다.타야는 1~2미터 밖으로 나가떨어졌다.뿔에 찔린 옆구리에 긴 상처가 남은 것이 보였다.순간 두려움을 느낀 타야가 서둘러 일어나려는데 요오크가 달려들었다.
막을 수 없는 속도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요오크는 넘어져 있는 타야에게로 돌진했다.그녀는 무방비 상태로 일어나기 위해 허둥댔다.모래에 미끄러져 또다시 넘어지면서 타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언가 이상했다.충격이나 고통은 없었다.대신 뭔가 둔탁한 소리가 나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비틀거리는 요오크가 보였다.앞다리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갑자기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느껴졌다. 가죽 갑옷을 들추어보니 날카롭게 찢긴 자국 아래 피가 흐르는 상처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 오른쪽에는 리샤가 서 있었는데, 철 단도를 들고 있었다. 단도에는
요오크의 피처럼 보이는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리샤가 요오크를 공격한 것이다.자신을 바라보는 리샤의 푸른 눈을 보며 타야는 약 7년 전, 그들이 7살이 되던 그 해를 떠올렸다.
크고 웅장한 동굴에 그들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타야와 리샤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린 채 커다란 전사들을 따라갔다.돌로 만든 아치형의 동굴 내부에는 둥근 벽을 따라 횃불이 타올랐다. 그 거대한 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 작고 나약하게 느껴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곳에는 부족원 다수가 둥글게 앉아있었다.타야는 익숙한 얼굴 몇을 보았지만,감히 인사를 하지는 못했다. 부족원들이 모여앉은 가운데에 죽은 새끼 요오크 한 마리와 날카로워 보이는 철 단도 두 개가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것들을 향해 동리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그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갑자기 횟불들의 바로 앞까지 타야와 리샤를 데려온 전사들이 뿔뿔히 흩어졌다.그들은 덩그러니 횟불과 관중들 속에 서 있었다.동리우가 손짓했다.둘은 벌벌 떨며 걸음을 떼었다.
타야가 리샤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다.그녀가 도착하자 동리우는 앉으라는 듯 요오크 시체 앞을 탁탁 쳤다.티니스가 특별한 날에만 쓰는 방석을
두 개 안고 달려와 그들 앞에 놓았다. 방석에는 아름다운 사막이 금빛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타야가 자리에 앉자 동리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동굴 안을 울려 메아리쳤다.
타야는 리샤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루티니 부족의 전사들은 들으십시오!나는 오늘 이 두 아이를 부족원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들은 숨을 죽였다. 방석을 꽉 쥔 손이 땀에 젖는게 느껴졌다.
"이 아이들은 루티니 부족에 태어나 지금,7살이 될 때까지 잘 버텨왔습니다.그러므로 나는 부족장의 권리로, 임명식을 열겠습니다."
그러고는 동리우가 요오크의 시체로 손을 뻗었다.타야는 몸을 움찔했다. 옆에 있는 리샤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동리우는 요오크의 목을 따 피를 바오밥나무 그릇에
몇 방울 받아냈다. 피 냄새가 풍겨왔다. 타야는 구역질이 났지만 애써 참아냈다.
"요오크의 피를 느끼게 해주자니, 전사들이여, 이 아이들을 부족원으로 받아주소서."
동리우가 약지손가락으로 피를 찍었다.
타야의 떨리는 이마에 붉고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졌다.동리우는 리샤에게도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그들은 감히 지금 무얼 하는거냐고 묻지 못했다.
"너희 모두 7살이 되었으니,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이것을 받아라."
그가 손을 움직여 은빛 단도를 집어올렸다. 동리우의 손목에 요오크의 이빨로 만든 듯한 흰 팔찌가 보였다.
단도를 집은 동리우는 타야와 눈을 마주쳤다.타야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양손으로 칼을 받았다. 그녀는 순간 움찔했다. 생각보다 아주 무거웠다. 옆에서 리샤도 단도를 받아드는게 보였다.
"이 칼이 가벼워질 때가 오면 너희도 전사가 될 수 있을 게다."
타야는 천천히 회상을 마쳤다.1시간 같은
1분동안의.
다소 뻣뻣했지만 리샤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활짝 웃으려던 타야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그새 정신을 차린 요오크가 성난 소리로 포효하며 리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리샤!!"
리샤는 당황한 나머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다행히 요오크는 다리를 다친 충격으로 그리 빨리 달리지 못했다.타야는 단도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 리샤 앞을 가로막았다.또다시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타야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그녀는 지금이 때라는 것을, 벽을 부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난히 번쩍거리는듯 보이는
단도를 단단히 움켜쥔 채, 타야는 요오크의 턱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요오크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은은한 쾌감을 느끼며 타야가 뒤로 물러섰다.
"타야...너...!"
리샤가 피로 젖은 바닥과 요오크 시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녀의 눈에 충격이 비쳤다.
"리샤...내가...아니,우리가...해냈어..해냈다고,리샤!"
타야는 리샤를 향해 달려가 격한 포옹을 했다. 옆구리가 따끔거렸다.그래도 타야는 포옹을 풀지 않았다.
리샤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얼떨떨한듯 고개를 흔들었다. 타야의 상처입은 손을 감은 가죽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타야는 룸을 꺼내 찢어진 무릎을 꽁꽁 싸맸다.
룸을 꼬아 마무리한 뒤 노을을 바라보며 그들은 천천히 텐트로 향했다.
"...타야!!!너 도데체...?!"
입구에서 그들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동리우가 타야의 어깨에 얹힌 요오크의 시체를 보고 외쳤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아버지의 잔소리를 가장 듣기 싫은 상태였다. 피곤과 땀에 젖은 타야는 그대로 동리우를 지나쳤다.멀리 식당 텐트에 사람들이 줄지어 배식을 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모래와 먼지, 요오크의 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그녀가 리샤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다행이다. 저녁 배식은 안 놓쳤네."
리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손은 아직 요오크 피가 묻어있는 쇠 단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에 요오크의 적갈색 피가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타야의 개인 텐트로 향한 후, 요오크를 내려놓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핏자국이 말라붙은 요오크가 텐트 바닥과 잡동사니 위에 떨어졌다. 타야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텐트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그러나 그녀가 지퍼를 올리자마자, 동리우가 그들의 텐트 지퍼를 홱 열어젖혔다.그의 얼굴이 땀에 젖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타야, 리샤!! 이게 도데체 무슨 일이냐?!아니다, 아니야.
타야, 지금당장 내 텐트로 오너라!"
동리우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타야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불편한 신음소리를 내며 텐트 밖으로 걸어나갔다.
"너, 도데체 어디 있었던 거야?"
타야를 향해 가죽방석을 던지며 동리우가 물었다.
걱정스럽다 못해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정말 싫어.'
그녀는 괜히 방석을 꾹꾹 눌러대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방석은 7년 전 자신이 앉았던 방석과 똑같은 방석이었다. 타야의 손가락이 금빛 실을 훑었다.
연갈색으로 수놓인 낙타 위에 두 명의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사야타가 살아 있었다면 좀 덜했으려나...'
타야는 생각했다.갑자기 사야타가 보고싶었다.
사야타는 그녀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난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6살이 된 그해, 텐트로 들어온 전갈에게
세게 쏘여 죽고말았다. 사야타가 너무 어린 나이에 죽는 바람에 동리우와 티니스는 사야타를 없었던 아이처럼 잊고 살아가려 애썼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사야타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타야는 사야타를 잊지 못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그렇게 좋은 추억이 많은데..'
자신의 자리에 앉아 추궁하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동리우의 눈빛을 피하며 타야는 추억을 되뇌었다.
"어서,타야. 어디있었던 거야?!"
동리우가 그녀를 다그쳤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전갈을 잡고 있었어요."
예의를 갖추려 애쓰며 타야가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은 사야타와의 추억에 가 있었다.
"전갈이 잘 잡히는, 전갈무리가 있는 곳이요."
동리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타야는 어쩔 수 없이 상상을 그만두고
동리우를 쳐다보았다.
"확실하니?'요오크의 거대한 산'이 아니라?"
"그래요. 애초에 제가 그곳에 있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걸요.
얼마 전 모래폭풍 때문에 '요오크의 거대한 산'이 사라졌잖아요."
타야는 짜증이 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궈 자신의 손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어느새 피가 말라 가죽이 적갈색으로 변해 있었다.그녀는 둘둘 감긴 가죽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야!넌 아침에 전갈을 잡으러 나가서 해가 지도록 돌아오질 않았어. 게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피에 젖은 채 요오크를 들쳐메고 왔잖아!"
동리우의 언성이 높아졌다.타야는 몸에 난 상처들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한 것 뿐이에요.게다가 전 몇 달 뒤면 성인이고, 전사고, 청금을 받을 거라고요."
타야는 조용히 대꾸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놓인 책장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색에 두툼한 책이 눈에 띄었다.
그 책에는 금박을 입힌 글씨로 'purple Blood(보랏빛 피)'라고 적혀있었다.
"타야, 넌...내 하나뿐인 딸이고, 내가 널 정말 아낀다는걸, 너도 알잖니!"
타야가 고개를 돌려 동리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아낀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좋은 일이지만, 이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하나뿐인 딸이라며 사야타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 말은 타야를 달래긴 커녕 짜증을 배로 만드는 말이었다. 동리우는 반항적인 타야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요오크는 위험한 동물이야, 타야. 너 같은 여자아이가 잡을 게 아니란 말이야. 죽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네가 죽었다면 어떻게 됬겠니? 티니스에게는 뭐라고 말하겠니?
부족원들은?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그러니까 제발, 타야. 위험한 일은 하지 마."
"그렇지만..."
타야는 뭐라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동리우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어서 가서 배식이 끝나기 전에 저녁을 먹어라."
그녀는 마침 다 풀어낸 피 묻은 가죽을 들고 텐트를 나섰다.
"하아..."
전갈구이와 손질된 선인장, 물이 든 가시그릇을 들고 텐트로 향하며 타야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전갈구이였지만, 지금은 별 관심이 없었다.
텐트에 들어가니 리샤는 이미 밥을 먹고 있었다.
"뭐라고 하셨는데?"
리샤가 다 안다는듯 물었다.
"...네가 생각한 것과 똑같은 말."
타야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타야는 그릇을 대충 바닥에 내려놓고 텐트 지퍼를 끝까지 올려버린 다음, 어둠을 밝히기 위해 요오크 기름 양초를 켰다.
"나 줘.어차피 안 먹을 거잖아."
그녀가 자리에 앉자 리샤가 타야의 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타야는 가시그릇을 리샤 쪽으로 슥 밀어냈다.
텐트 안에는 리샤가 전갈을 먹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타야는 조금 일찍 잠에서 깼다.해가 모래산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그녀 옆에서는 전갈 껍질 몇 조각과 함께 리샤가 코를 골았다.그제야 타야는 지난밤, 리샤에게 저녁을 모두 주어, 자신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의 배에서 조그맣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타야는 그대로 다시 누워 티니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1분도 채 되지 않아 그녀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리샤가 덮은 담요를 제외하고 다른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어제 리샤가 저녁을 먹고 팽개쳐둔
가시그릇, 어렸을때 사야타와 나무 깎는 연습을 할때 함께 만든 작은 요오크 조각, 리샤와 산책을 나가 발견한 씨앗 등등.신기하게도 온갖 물건들에 짓뭉개져 있었을 씨앗에서는 작은 싹이 돋아나 있었다.
"리샤!이것 좀 봐."
새싹도 보여줄 겸 타야는 리샤를 흔들어깨웠다.
"...타야?"
리샤가 눈을 끔뻑이며 일어나 앉았다.
"어제는 완전 의기소침하더니."
리샤가 담요를 개며 피식 웃었다.
타야는 다시 싹이 난 씨앗을 들어보였다.
"이거 봐. 싹이 돋았어. 이거 너랑 같이 주운 거잖아?"
"어!그러네.무슨 싹일까?"
리샤가 잠이 다 깬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싹을 쳐다보았다.
"티니스는 식물을 잘 아니까, 엄마에게 물어보자!"
타야가 말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리샤...왜 엄마가 안 오지?"
"그러게...해가 벌써 중천에 떴는데!"
타야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엊저녁 빨지 못한 가죽끈 대신 새 끈을 챙겼다. 자신의 머리칼을 비현실적으로 꽉 붙든 머리끈처럼 심장이 죄여왔다.
'티니스가 무슨 일이 있으신가?'
자신이 태어난 후로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어제도 저녁에 티니스를 보지 못했다.
보통 때라면 곧장 그녀에게 달려왔을텐데.
리샤보다 훨씬 빠르게 준비를 마친 타야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부족원들이 웅성거렸다. 몇몇은 식당 텐트를 기웃거렸다.
그때, 동리우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오고있었다.
어젯밤 일은 잊은 듯했다.
"타야!일어났구나."
"무슨 일이에요?티니스가 안 오셨어요!"
타야는 다짜고짜 물었다.
동리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 치료사 한 명이 다급하게 동리우에게 달려왔다. 어릴적부터 자주 봐온 의사 룬이었다. 룬이 동리우의 귀에 급히 귓속말을 했다.
동리우는 곧장 몸을 돌려 간호텐트로 향했다.
"따라오너라!타야."
동리우가 외쳤다.
그녀는 조금 더 천천히 뒤따랐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간호텐트에는 여자 한명이 누워있었다. 얼굴은 붉은색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티니스였다.타야는 헉,하고 소리내어 숨을 들이마셨다.
"피가..붉은색이 아니에요.피가 보랏빛이에요.이런 병은 본적이 없어요.어떤 물질이 티니스의 몸을 부패시키고 있어요.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면 이틀 내로 모두 썩고 말 거에요."
룬이 말했다.그녀의 목소리가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충격에 사로잡힌 방 안은 금세 착잡해졌다. 간간히 내뱉는 티니스의 신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왜...왜 나에게 알리지 않은 거에요?왜?어제 제가 돌아온 뒤부터 티니스는 보이지 않았어요.왜 저렇게 된거에요?!"
이윽고 타야가 동리우에게 따졌다.
동리우는 고개를 숙여 의식 없는 티니스를 바라보았다.
"네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 너를 걱정해 널 찾으러 가려 했다. 나는 반대했어. 사막의 밤은 너무나 위험하니까.
하지만 티니스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 홀로 몰래 빠져나가 널 찾았지. 그리고 오늘 새벽, 입구를 지키던 페리트가 네 엄마를 업고 내게 왔어."
동리우가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타야를 쳐다보았다. 타야는 푹 고개를 숙였다. 동리우에게 자신이 울음을 참고 있다는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티니스는, 그러니까 엄마는 타야 자신때문에 목숨이 위험해진 것이었다.
'그깟 요오크가 뭐라고.그깟 청금이 뭐라고!'
타야는 속으로 끊임없이 후회했다. 모래폭풍같은 죄책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타야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텐트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물탱크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늘 그곳으로 향했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물탱크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정리되는 듯했다.
타야의 발걸음은 물탱크를 지나 오아시스로 이어졌다.
햇빛에 반짝이는 오아시스 표면을 바라보며 타야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때 누군가 따스한 손길로 타야의 어깨를 감쌌다.
타야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일어나 뒤돌아섰다.
리샤가 싹이 난 씨앗을 들고 서있었다. 그제야 타야는
씨앗이 생각났다. 아침에 일어나 씨앗을 발견한 것이 마치 몇 년 전처럼 느껴졌다.
"가자, 텐트로."
리샤가 말했다. 왜 울었는지 묻지도, 궁금해하는 내색도
없었다. 그녀는 타야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타야는 말없이 리샤를 따라 텐트로 향했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리샤에게 고마워했다.
태양이 가장 뜨거운 시간이 되었다. 깜빡, 텐트에서 잠이 들었던 타야는 일어나 눈을 비볐다. 밖으로 나가니
리샤가 물통과 모피스카프를 건네며 말했다.
"동리우가 사냥을 다녀오라고 하셨어. 요오크 말고."
".... 그래."
'고마워, 리샤.'
타야는 속으로 말했다.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아 오히려 말이 차갑게 나갔다.
입구로 가니 전사 니카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몇 년 전 요오크 폭동 사건으로 남동생을 잃은 니카는 그 후 말수가 줄었지만, 슬픔을 크게 내색하진 않았다. 그들은 서로 고개만 까딱 했다.
선인장 군락이 보였다. 먼저 온 아이도 한 명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곱슬머리가 딱 힐리였다.
올해 10살인 힐리가 누나 헬과 함께 선인장을 채취하고 있었다. 리샤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코를 훌쩍였다.
리샤에게도 남동생이 있었다. 테시는 리샤와 2살이 차이나는 남동생이었다. 그녀가 10살이 된 해, 그 해는
그녀에게 인생 최악의 해였다. 리샤의 10번째 생일은
요오크 사냥 도중 발생한 사고로 아버지의 사망일이
되었고, 이틀 뒤 요오크 폭동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해가 가장 높이 뜬 시간, 타야와 그녀가 전갈 사냥을 나가있었을 때 터졌다. 요오크 수십 마리가 부족 마을을 습격했고,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녀가 타야와 함께 전갈을 한아름 안고 도착했을때는
이미 마을이 초토화된 뒤였다.리샤는 서둘러 엄마와 테시를 찾아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산산히 부서진 자신의 집 앞에 섰다.
"엄마..테시..!"
별안간 그녀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몰아쳤다.
리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집의 잔해를 뒤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돌조각에 손바닥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오고 붉은 피가 흘렀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얼마 안 가 잔해에 깔린 테시와 엄마가 보였다. 테시는 이미 죽은 듯했고, 엄마는 조그맣게 숨을 쉬고 있었다. 리샤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엄마를 흔들었다. 희미한 신음과 함께 엄마가 깨어났다.두 사람은 잠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은 이미 이 상황의 결말을 알고있었지만, 끊임없이 부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엄마가 입을 열었다. 아주 작았지만 분명하게, 잔해 속에서 그녀가 평생 사랑한, 사랑해야 할 사람이 말했다.
"도망쳐...,"
그리고 끝이었다.엄마는 더 이상 이곳에,사막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라고 했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문득, 리샤가 과거에서 돌아왔다. 타야는 이미 헬과 함께 선인장을 따는 중이었다.
"리샤! 뭐 해,멀뚱히 서서..얼른 와서 도와줘!이 선인장은 정말 커."
밝게 외치는 소리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나왔다. 티가 나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녀는 슬퍼하고 있었다.
타야는 헬과 인사하고 선인장을 따기 시작했다.
고통이 가슴 한쪽을 짓눌렀다. 리샤를 부른 뒤 그녀의 손은 이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음은 결코 그곳에 있지 않았다.
'티니스가 저렇게 된 건 나 때문이야. 어떻게서든 엄마를 살려야해!'
그녀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퍼뜩, 타야의 머릿속에 희미한 이미지가 하나 떠올랐다.
짙은 색 표지에 'purple Blood'라고 적힌 책이었다.
분명, 그때 룬이 피가 보라색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책을 어디서 보았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타야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수확 중이던 선인장을 품속에 쑤셔넣고 텐트마을로 달려갔다.
'도서관..도서관..!'
타야는 생각했다.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푹푹 빠져드는
모래 때문에 자꾸만 속도가 줄었다. 이윽고 마을에 도착하자 타야의 눈은 큰 은빛 텐트를 찾아헤맸다.
마침내 그녀는 도서관에 도착했다. 웬만한 책들은 다 있는 곳이었다. 타야는 지퍼를 열어젖히고 P열로 향했다.
한 권 한 권 책을 훑는 타야의 손길이 순간 뚝 멈췄다.
빽빽한 P열의 책들 중 빈곳이 있었다.
"뭐 찾니?"
가만히 멈춰선 그녀를 발견한 도서관 관리자 라이언이
물었다.
"아..혹시..'Purple Blood'라는 책이 있나요?"
"있었는데..지금은 없구나. 누가 빌려갔을 거야..아, 그래.
부족장님이 빌려가셨었단다. 왜, 그 책이 필요하니? 재미있진 않을텐데. 불길한 예언만 잔뜩 적혀있거든."
라이언의 말을 듣고 타야는 기억을 떠올렸다. 맞다.
그녀는 동리우의 텐트에서 그 책을 보았었다.
"그게..아무튼 감사합니다.정말 감사해요!"
타야는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점심밥을 준비하던 요리사 이즈가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부욱!
타야가 부족장의 텐트 문을 열어졎혔다. 다행히 동리우는 티니스가 있는 간호텐트에 간 것 같았다.
그녀는 서둘러 책장을 뒤졌다. 낯익은 금박 글씨가 눈에 띄었다. 그 책이었다.
"때가 되면...다시..오리라..재앙이...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개인 텐트로 돌아온 타야가 지퍼를 잠그고 책장을 넘겼다. 인체해부도 하나가 보였다. 워낙 낡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피가 보라색인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반쯤 검게 변한 사람의 장기들도 그려져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천천히, 몸이 썩어가는 것 같은 끔찍한 그림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기며 타야는 티니스를 떠올렸다. 다음 장에는 독이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벌레가 보였다. 그림으로 보아 사람의 5배 이상 큰 것 같았다. 붉은 보랏빛의 몸통과 날카롭게 튀어나온 두 개의 이빨. 무엇보다 그 벌레는 눈이 없었다.
"타야..너 뭐 해?"
화들짝 놀란 타야는 고개를 들었다. 리샤였다.
"이건..'죽음의 스네이크'잖아?"
리샤가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이 책을 알아?"
"그럼..어렸을때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주셨었는데.."
타야는 깜짝 놀라 그 페이지의 제목을 읽어보았다.
"죽음의..스네이크...진짜네.."
리샤가 페이지 아래쪽의 설명을 읽었다.
"죽음의 스네이크가 돌아오고..악몽같은 나날이 시작될 것이다..부족은..하나둘 죽어갈 것이다..맙소사, 타야
이게 도대체 무슨 책이야?"
타야는 말없이 책을 덮어 표지를 보여주었다.
"'Purple Blood'..이건 부족의 예언서잖아?"
리샤가 소리쳤다.
"죽음의 스네이크가 돌아올거라는 뜻인가.."
"죽음의 스네이크가 뭔데?"
타야가 혼잣말로 읊조리는 리샤에게 물었다.
"죽음의 스네이크는..큰 뱀 같은 벌레야.날카로운 독니가 두 개 있고, 눈이 없지.바로 이 그림처럼 말이야. 죽음의 스네이크에게 물리면 독이 몸에 퍼져 속에서부터 천천히 썩어 죽게 돼..그리고 독 때문에 피가 보라색으로 변하지..하지만 전설일 뿐이라서 실제로는 목격한 사람이 없어."
리샤가 말했다.타야는 소름이 돋았다. 충격에 사로잡힌 채 타야는 다음 페이지로 종이를 넘겼다.
사락 소리가 나며 종이가 넘어갔다. 그 순간, 강렬한
빛이 타야의 눈에 꽂혔다. 그녀는 당황한 채 눈을 가렸다. 빛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작은 구멍같은 동그라미가 그려진 예언서의 페이지가 펼쳐져있었다.
'뭐지..?'
타야는 눈을 깜빡거렸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부족은 살아남을 것이다...예언의 아이가 있을지니..그 아이가 정화의 구슬을 찾아 세상을 정화시킬때 비로소 평화가 내리리라..하지만 예언의 아이는 구슬의 힘을 버티지 못하니, 희생자가 생길지어다. 예언의 아이가 이 책을 본다면 여기서 빛을 보게 되리.."
리샤가 책의 빼곡한 글씨들을 읽어내려갔다.
"예언의 아이..이 구멍에서 빛을 봐야지만 예언의 아이라는 걸 알수있다는 것 같은데..."
리샤는 말끝을 흐리며 힐끗 타야를 쳐다보았다.
타야는 두려워졌다. 자신이 예언의 아이이고, 부족을 구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면, 리샤의 반응은 어떨까.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공포가 심장을 죄어왔다.
동시에 머리끈도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듯 조였다.
'내가..예언의 아이라고?'
타야가 깊은 생각에 빠진 그때였다.
"혀어엉!!니카 누나!!"
리안의 비명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부족원들은 물론, 동리우까지 모든 사람들이 입구로 몰려들었다. 그곳에는 끔찍하게도, 보랏빛 피를 흘리며
쓰러진 루안과 니카, 그들을 끌고 온 듯한 전사 샤인이 있었다. 그리고 마치 보란듯이, 루안과 니카의 어깻죽지에는 보랏빛 피가 흘러나오는 구멍이 두 개가 뚫려있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샤인,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동리우가 빠른걸음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너무...무서..웠어요..."
샤인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루안이 눈을 떠 동생을 바라보았다. 충혈된
눈동자가 서서히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조그맣게 루안이 속삭였다.
"도망쳐."
루안은 다시 고개를 떨궜다. 황급히 룬이 달려와 니카와 루안의 맥박을 재었다.
"형..죽으면 안돼...형!"
리안이 루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룬이 황급히 리안을 제지했다.
"저 보라색을 봐.너도 알잖니...전염성이 있을지도 몰라!"
"니카..."
타야는 속삭이듯 내뱉었다. 인사만 하는 사이였지만 그녀는 속으로 니카를 존경했었다.
'이 모든게 사실일까?..예언서가 사실이라면?정말 내가 죽어야하는 거라면..?'
타야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녀는, 죽음에 대해 관심이 있지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타야는 지금, 죽음이 두려웠다.
"룬!룬!"
누군가 니카를 살피고 있는 룬을 불렀다.
"래이!"
룬이 뒤돌아 자신의 제자 래이를 맞았다. 13살 래이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래이는 슬퍼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티니스가..티니스께서..."
래이는 말을 잊지 못했다. 햇빛이 비치자 래이의 손에 묻은 보랓빛 피가 번들거렸다. 그러고 보니 래이의 몸 곳곳에는 보랏빛 피가 묻어있었다.
"티니스께서 돌아가셨어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래이가 외쳤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졌다. 룬이 달려갔다. 그 순간, 타야는 보았다.
래이의 눈에서 보라색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위험해요! 룬!"
타야가 말릴 새도 없이 룬이 달려갔다.
래이의 몸에서는 이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룬은 그런 것따위 신경쓰이지 않는듯 래이를 감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밤이 찾아왔다.
부족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티니스는 죽었으며, 3명이 쓰러졌다.
룬이 정신없이 그들을 돌봤지만 정체불명의
병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부족원 모두가 밤이 깊어질 때까지 소식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매우 피곤한 기색의 룬이 의료텐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할 수 있는건 다 했어요. 제 힘으로는..이 독을 없앨 수 없네요.."
부족원들 사이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룬이 다시 텐트 입구에 나타났다. 그리고 동리우에게 손짓했다. 타야는 조심스럽게 의료텐트 뒤쪽으로 걸어가 천에 귀를 댔다.
"예언이 실현된 것 같아요. 어떡하죠, 이제?"
룬의 목소리가 떨렸다.
'예언이라니..?'
타야는 생각했다. 불현듯 라이언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아주 불길한 예언만 잔뜩 적힌 예언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하지만..난 이걸 감당할 수 없어요. 과연 예언서에서 빛을 본 이가 있을까요? 애초에 예언서나 죽음의 스네이크, 리스를 본 사람이라도 더 있을까요?"
동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야는 순간 깨달았다. 그 책은 단순한 예언서가 아닌, 실제로 루티니 부족의 미래를 예언한 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족을 '죽음의 스네이크' 리스에게서 구할 수 있는 건 빛의 아이, 즉 자신이었다.
"타야! 타야! 어디갔었어!"
리샤의 목소리가 텐트 사이로 메아리쳤다.
타야는 뒤돌아 리샤를 맞았다.
리샤는 짧은 옷 위에 가죽 담요를 두른 차림이었다.
"리샤...."
타야는 두려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리샤가 달려와 담요로 그녀를 감싸안았다.
"어디있었어.."
리샤가 속삭였다.
"네 말이 맞아, 리샤.. 내가 빛의 아이였어."
"무슨 소리야?"
타야는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purple Blood 책의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나..그 페이지에서 빛을 보았어."
"......."
타야는 별빛이 리샤의 눈에서 반짝이다 서서히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때, 텐트 지퍼가 홱 열리며 룬과 동리우가 나왔다. 둘은 당황한 채 재빨리 떨어졌다.
"부족 여러분은 들으십시오!"
동리우가 동그랗게 둘러 앉은 부족원들 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몇십년 전, 한 백발의 노인이 우리 마을을 찾아왔던 걸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동리우의 말에 꾸벅꾸벅 졸던 원로 몇 명이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인은 요오크 가죽 한 장과 물 한 잔을 구걸하고는 나에게 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
동리우는 타야가 얼마 전에 가져갔던 예언서,
'Purple blood' 책을 높이 들었다. 살짝 바랜 금빛 글씨가 차갑게 빛났다.
"이 책은 단순한 예언서가 아닙니다. 진짜 우리 루티니 부족의 미래를 예언한 책입니다."
부족원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예언이 실현된 것 같습니다."
-1부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