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상태로 잠에서 깨버렸다. 그 애에 대해 기록하려고 노트를 펼쳤을 때, 못 보던 문장이 생겨났다.
‘오늘은 네가 나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내
가 널 잊어야 해.’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노트는 베개 옆에 놓아두었다.
잠들기 전 몇 번이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널 잊어야 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애가 나를 잊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왜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이렇게 불안한 걸까.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학교에 있었다.
언제나처럼 햇빛은 조금 따뜻했고, 운동장 한쪽에 늘어진 나무의 그림자는 길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너무 조용했다.
복도에서 들리던 발소리도, 운동장에서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장소로 걸어갔다.
그 애와 처음 만났던 곳.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애였다.
나는 안도하며 웃었다.
“찾고 있었어.”
그런데 그 애는 나를 바라보면서도 웃지 않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내가 묻자 그 애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잠시 망설이던 그 애가 물었다.
“우리 아는 사이야?”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럴 거라고.
“무슨 소리야.”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 나 기억하잖아.”
그 애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미안해.”
“…뭐?”
“정말 미안한데..”
그 애가 시선을 피했다.
“기억이 안 나.”
심장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애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애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때마다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데,
그 애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야.”
“그럼 이건 뭐야?”
나는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냈다.
매일 밤 그 애를 잊지 않기 위해 적었던 노트였다.
나는 급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 애의 이름.
그 애와 나눈 이야기.
우리가 앉았던 장소.
그 애가 했던 말.
수없이 많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내가 적었던 글씨인데,
내용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첫 페이지를 펼쳤다.
‘오늘 처음 만난 아이와 이야기를 했다.’
“..뭐야?”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이상하게 그 아이가 나를 오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또 한 장.
‘그 아이는 계속 나에게 무언가를 기억해달라고 했다.’
손끝이 떨렸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빠르게 넘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 내가 쓴 거 아니야.”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노트의 모든 글씨가—
내 글씨가 아니었다.
“……누가 쓴 거야?”
그 애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가 썼어.”
“아니야.”
“네가 쓴 거야.”
“아니라고!”
목소리가 커졌다.
그 순간,
학교 전체에 종소리가 울렸다.
딩—
한 번.
딩—
두 번.
나는 무심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곗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종소리는 계속 울렸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
.
.
열두 번.
마지막 종이 울린 순간,
그 애가 내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예전처럼.
“뛰어.”
“어디로?”
“아무 데로나.”
“왜?”
그 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복도를 달렸다.
교실 문이 하나씩 열렸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도,
의자도,
칠판도.
텅 빈 교실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소리쳤다.
그 애가 달리면서 말했다.
“네가 기억하기 시작했어.”
“그게 왜?”
“그러면 안 돼.”
“왜 안 되는데!”
그 애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번에는..”
그 애가 힘겹게 말했다.
“네가 나를 기억하면 안 돼.”
나는 멍하니 그 애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애는 내게 기억해달라고 했다.
잊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정반대였다.
“왜?”
그 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왜 나한테 계속 잊으라고 하는 거야?”
그 애의 입술이 조금 떨렸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기억하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날도 기억하게 되니까.”
“무슨 날?”
그 애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상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울고 있었다.
차가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
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뭐야, 이거..”
그 애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안 돼.”
“내가 뭘 기억하고 있는 거야?”
“제발.”
“너 대체 누구야?”
그 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 애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매일 꿈에서 만났던 얼굴도 아니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도.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너.”
그 애가 숨을 멈췄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죽었어?”
그 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학교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창문이 깨지고,
복도의 벽이 갈라지고,
멀리서 운동장의 나무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 애는 울면서 웃었다.
처음 만났던 날처럼.
“이제 기억했네.”
“잠깐만”
나는 그 애의 손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지 않으려고 했다.
“어디 가려고?”
“나는 이제 가야 해.”
“싫어.”
“괜찮아.”
“싫다고.”
그 애가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
“이번에는 내가 널 잊어야 하니까.”
“..왜?”
그 애가 웃었다.
“그래야 네가 깨어날 수 있으니까.”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마지막으로 들린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리고 깨어나면…”
그 애가 말했다.
“이번에는 나를 잊지 마.”
나는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아침이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꿈이었다.
그저 꿈이었을 뿐인데—
눈가가 젖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침대 옆을 바라보았다.
노트가 있었다.
손을 뻗어 노트를 집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어제까지 없었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문장을 읽었다.
‘이제 기억났지?’
그리고 그 아래,
처음 보는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왜인지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